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 데루모토 (문단 편집) === 오다 가문과의 싸움 === 그 후, 데루모토는 [[주고쿠]] 지방의 패자에 올라 각지에 세력을 신장하였다. 조부 모토나리 때부터 적대세력이였던 아마고 가문과 오토모 가문과 전쟁을 벌였고 이들을 제압하여 규슈와 주고쿠 지방에 세력을 확대해 갔다. 하지만 덴쇼 4년 (1576년) 음력 2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축출된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비호하였고 더욱이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의 승려가 거병하자 혼간지 편에서 병량과 탄약을 원조하여 오다 가문과 대립하였다. 당시 오다 가문은 에치고의 강적 [[우에스기 겐신]]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리 가문은 오다 가문보다 병력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간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하였고 음력 7월 제1차 기즈키가와구치 전투에서 오다 수군을 격파 대승을 하게 되었다. 또, 덴쇼 6년 (1578년) 음력 7월에는 고즈키 성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와 아마고 가문의 연합군과의 결전을 맞이 했지만 하시바 히데요시는 미키 성의 벳쇼 나가하루의 반란에 따라 미키 성으로 군대를 돌렸다. 고즈키 성에 홀로 남은 아마고 가문은 분전하지만 모리 가문에 패배하였다. 이로써 아마고 가문의 잔당을 뿌리뽑았으며 오다 가문에 대해서도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음력 3월 [[우에스기 겐신]]이 죽었고 더욱이 음력 11월에 일어난 제2차 기즈키가와구치 전투에서 철갑선[* 오다 노부나가의 명으로 [[구키 요시타카]]가 기존의 아타케부네에 방화용(防火用) 철판으로 배 전체를 둘렀다.]을 전장에 투입한 오다 군에게 패배하였고 모리 수군은 섬멸되었다. 이후 전황은 모리 가문에 불리하게 되어갔다. 덴쇼 7년 (1579년)에는 모리 가문에 종속되어 있던 비젠의 [[우키타 나오이에]]가 모리 가문을 배반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내통하였다. 덴쇼 8년 (1580년) 음력 1월에는 오다 군의 주고쿠 공략군 지휘관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끄는 군대가 미키 성을 함락하였고 [[벳쇼 나가하루]]는 자결하였다. (미키 전투) 다음해인 덴쇼 9년 (1581년) 이나바 돗토리 성도 포위 공격에 따른 병량고갈로 항복하게 되었고 모리 가문의 장수 깃카와 쓰네이에는 자결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데루모토는 숙부들과 함께 출진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던 분고의 [[오토모 소린]]이 서쪽으로 공격해 왔으며 산인에서도 난조 모토츠구가 공격해오는 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덴쇼 10년 (1582년) 음력 4월 하시바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의 충신 시미즈 무네하루가 농성하는 빗추 다카마쓰 성을 공격한다. 공방전중 음력 6월 2일 [[교토]]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는 그곳에서 자결하였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모리 가문과 화친을 모색한다. 이로써 전황의 불리함을 느끼고 있던 데루모토와 화친하게 되었다. 결과 빗추 다카마쓰 성은 개성되었고, 화친의 조건으로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는 할복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